
성경에는 동명이인이 의외로 많습니다. 언젠가 신학생들에게 비느하스를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같이 선지자 사무엘과 연관된 그 비느하스를 말합니다. 어린 사무엘은 어머니 한나의 서원대로 성전에 바쳐집니다. 그렇게 사무엘은 평생을 나실인으로 살았습니다. 당시 성막은 실로에 있었고 늙은 엘리가 제사장 겸 사사로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홉니와 비느하스라는 개망나니 아들이 있었습니다. 명색이 제사장인데 제사, 곧 예배를 아주 우습게 알았습니다. 그러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하며 패전이 짙어집니다. 그러자 승리할 수 있는 묘책이라며 전쟁터로 법궤를 옮겨옵니다. 하지만 이기기는커녕 참패한 이스라엘은 법궤를 내팽개치고 줄행랑쳤습니다. 그 와중에 법궤를 옮겨온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었습니다.
그러니 법궤는 블레셋 차지가 되고 다곤 신전에 바쳐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그 누구도 빼앗긴 법궤를 되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법궤가 이스라엘로 되돌아옴은 순전히 하나님 역사입니다. 결과론이지만 성막과 법궤는 그 후 따로 있게 됩니다. 솔로몬 성전이 세워지기 전까지 분리 상태가 지속됩니다. 알고 보면 비느하스는 법궤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러니 그 비느하스를 떠올림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려는 비느하스는 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사무엘과 연관된 제사장 말고 어떤 비느하스가 있습니까? 어쩌면 비느하스란 이름은 이분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입니다. 이스라엘을 말할 때 하나님 언약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주 중요한 이스라엘 언약에 관여한 인물입니다. 과연 이스라엘 언약과 관련된 비느하스는 누구입니까?
혹시 "거룩한 분노"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거룩함은 하나님 성품을 가리키는 중요 요소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분노란 하나님께서 드러내신 분노란 뜻입니다. 혹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드러낸 분노를 뜻하기도 합니다. 가장 확실한 예시는 예수님께서 성전 바깥마당에서 보이신 분노입니다. 예수님은 장사꾼들이 펼쳐놓은 상을 뒤엎고 비둘기를 내쫓았습니다. 또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들을 후려치며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그 행동과 함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막 11:17)
예수님은 성전존재 이유를 오직 예배로 한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화를 내시며 장사꾼들을 호되게 내치셨습니다. 성전 내부에 판을 깐 장사꾼들 변명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당당하게 예배자들을 돕는 일이라 했습니다. 하지만 장사꾼들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습니다. 이처럼 회색 신앙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모세가 이끈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이집트에서 나와 광야 생활한 지 어언 사십여 년이 흘렀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연스레 세대교체가 이루어집니다. 돌이켜보니 광야는 1세대들 무덤이 되었습니다. 모압 평지에서 2세대 이스라엘은 요단강 너머 가나안을 바라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바로 앞에 있습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이스라엘 백성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옳습니까? 약속의 땅이 코앞인데 이스라엘은 혼합주의 신앙에 흔들렸습니다.
거짓 선지자 발람이 들이민 미디안 풍속을 보십시오. 친교를 덫으로 삼아 이스라엘을 회색 신앙으로 물들였습니다. 미디안 여인들과 뒤엉킨 행위는 단순한 음행이 아닙니다. 신앙을 빙자한 행위였기에 이스라엘은 급속하게 빠져들었습니다. 절제가 미덕이던 광야 생활은 어느새 기억에서 지웠습니다. 그렇게 어느 순간부터 거룩함은 잊어버리고 쾌락만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니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과연 하나님께서 부르신 이스라엘이 맞습니까? 이스라엘 정체성마저 마구 흔들리던 위기입니다. 하나님은 바알브올에 빠진 이스라엘에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백성의 수령들을 목매달라고 명하셨습니다. 아울러 이스라엘에 염병을 내리셔서 이만사천 명이 떼죽음했습니다. 그때 한사람이 정의를 떠올리며 불쑥 일어섰습니다. 그의 손에는 예리한 창 하나가 들려졌습니다. 그는 그 창으로 남녀 한 쌍을 찔러 죽였습니다(민 25:14-15). 하나님이 그 사건을 두고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내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민 25:11-13)
비느하스는 아론의 손자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제사장이 맞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인 그가 창으로 사람을 찔러 죽였습니다. 분명 끔찍한 살인사건입니다. 더구나 살인한 자가 제사장입니다. 얼마나 분노에 찼으면 두 사람을 한꺼번에 찔러 죽였습니다. 당연히 온 이스라엘이 시끄럽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 비느하스가 한 일은 나, 곧 하나님을 대신한 일이라고 말입니다. 새 번역은 "질투"란 말 대신 "화"라고 했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 언약을 다룰 때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왜냐면 비느하스에게 주신 "내 평화의 언약(my covenant of peace)"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 평화의 언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통상 언약은 쌍방이 조율하는 법인데 이 언약은 일방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그리고 조건 없이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평화의 언약 내용이 무엇입니까? 비느하스와 그 후손에게 영원히 제사장 직분을 약속했습니다. 천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 에스라가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스룹바벨 성전건축은 엉거주춤 시간만 흐르고 있었습니다. 솔로몬 성전과 비교하니 지성소가 부실하다 못해 참담했습니다. 있어야 할 그 무엇도 없는, 말 그대로 짝퉁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스룹바벨 성전은 세워졌습니다. 심지어 솔로몬 성전보다 더한 영광이 있다고 확인합니다(학 2:9). 학개 선지자가 예언한 영광이 다름 아닌 평화입니다(<새 번역>).
잘 생각해 보십시오. 광야교회 시절 하나님이 비느하스에게 평화의 언약을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동시대 선지자인 학개가 다시금 평화를 말씀합니다. 에스라는 그 평화의 언약에서 영원한 제사장을 발견합니다. 에스라 종교개혁 특징은 순혈주의라 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제사장 순혈주의입니다. 왜 에스라가 제사장 순혈주의를 모토로 한 개혁을 단행했겠습니까? 그리고 예루살렘 광장에서 율법을 낭독하며 사경회를 했겠습니까(느 7:73-8:18)? 영원히 제사장이 되게 하겠다는 평화의 언약이 무엇을 암시합니까?
제사장 메시야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 제사장 메시야가 어디에서 일하겠습니까? 당연히 성전 아니겠습니까? 솔로몬 성전과 비교하면 스룹바벨 성전은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건축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평화의 언약에 기초한 영원한 제사장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하지만 에스라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예언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말라기는 에스라와 동시대 선지자는 아니라고 보입니다. 그렇게 에스라 시대가 지나고 성전예배가 느슨해질 무렵 등장합니다. 선지자 말라기는 천년을 이어온 영원한 제사장 언약이 깨졌음을 선포합니다.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을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깨뜨렸느니라."(말 2:5-8)
제사장 그리스도는 어떻게 파기되었습니까? 얌니아 회의는 교회를 가리키는 "나사렛 사람들"을 이단으로 규정했습니다. 교회를 내친 유대교가 교회가 반박하리라 예측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무엇보다 손봐야 하겠습니까? 성전 파괴로 인해 제사장 메시야는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말라기서가 보인다면 어떻겠습니까? 성취된 예언이 한눈에 보이질 않겠습니까? 제 발이 저린 랍비들은 부랴부랴 말라기서를 중간에 숨겼습니다. 히브리어 성경 체제로 회귀한다는 명분 아래 말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저자는 그 형편과 무관하게 예수님이 제사장이심을 드러냅니다.
시간이 한참 흘러 397년 카르타고에서 종교회의가 열립니다. 그곳에서 교회는 신구약 성경 66권을 정경으로 최종적으로 수납했습니다. 구약성경은 외경을 제외한 칠십인경, 곧 39권을 편집 그대로 수납합니다. 여기에 신약 27권을 더해 66권 체제를 최종 결의했습니다. 그때부터 신구약성경 66권만이 정확무오한 하나님 말씀임을 믿고 따릅니다.




